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 김승옥의 霧津紀行(무진기행), '무진으로 가는 버스' 중에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3년 만에 복학한 학교는 기대 이하이기도 이상이기도 했다. 할 것을 해야할 나이이기에 좀 빡빡하게 살아보리라 혼자 다짐도 했지만 그 다짐은 담배 하나가 다 타들어가는 것보다 빠르게 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어딘가 한 번 다녀왔으면 하고 생각하던 터에 어디 한 번 다녀오자는 병준이형의 전화는 반가웠다.

애초에 순천만을 가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마침 합천 황매산 철쭉제랑 그 기간이 맞아떨어져 거기나 가볼까하고 형의 당직실에서 둘은 검색을 하기까지 했다. 새벽이 되어가자 내리기 시작한 비는 내일도 계속 될 거 같았다. 그렇게 비가 올 때는 바다가 생각이 난다. 이문열 소설에나 나올듯 한 관념적이고 도도한 바다. 한 곁에 갈대숲을 가지고 있는 도도한 바다를 기대하며 순천만으로 떠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순천만은 그런 도도한 바다가 아니었다. 갯벌 위에 선 갈대, 바다를 향해 그 치밀한 틈을 엿보는 물줄기, 관청에서 관광객들이 갈대숲을 사이를 지나갈 수 있게 만들어놓은 조잡한 길. 갈대숲과 용산에 오르면 볼 수 있을거라 기대하게 하는 그 전경이 여행의 설레임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폭우와 함께 보고 싶은 바다는 아직 아니었다. 몇몇의 연인들을 헤집고 우리는 용산을 향해 올라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산에 발을 디디니 아직 2년도 지나지 않은 군생활이 생각이 나서 불쾌해졌다. 그렇게 오르고 올라 어느 한 연인의 허위 정보로 전망대 아닌 전망대로 가게 되었지만 섬처럼 갯벌을 표류하고 있는 갈대군락을 보며 담배를 하나 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제 날 때가 되지 않았는지 밑둥만 새파랗게 물든 갈대들은 정상에서 보아도 그 생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새파란 것이 위까지 물들면 섬과 같은 그것들은 새파래져서 여름이 가는 것을 알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 수많은 갈대 중에 나도 형도 우리 또래의 그 누구들도 있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별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어느 별과 그리고 그 별과 또 다른 별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가, 과학책에서 배운 바로써가 아니라, 마치 나의 눈이 점점 정확해져가고 있는 듯이 나의 시력에 뚜렷이 보여오는 것이다. 나는 그 도달할 길 없는 거리를 보는 데 홀려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순간 속에서 그대로 가슴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었다. 왜 그렇게 못 견디어했을까.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던 옛날 나는 왜 그렇게 못 견디어했을까.

- 김승옥의 霧津紀行(무진기행), '밤에 만난 사람들' 중에서


용산을 내려와 대대포구에 들어서서 우리는 나중에 어디서 장어를 먹을건지 살피고 커피를 한 잔 빼어들고 갈대길 끝이 어디인지를 알기 위해 안내표지판을 살폈다. 소설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지. 그 옆 표지판은 분명히 '무진'을 말하고 있었다. 난 그 전까지 무진이 지리산 어디나 단양 어딘가쯤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왜 안개'무'에 포구'진'을 쓰고 있었는지 몰랐을까. 난 그 때서야 마음이 들뜨고 이 여행에 완벽히 만족했다. 무진의 밤도 안개도 느낄 수 있으니 난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갈대길의 끝은 생각보다 멀었다. 차들은 잘도 그 끝을 보고 돌아가고 있었지만 얕은 비와 안개를 맞아가며 무진을 느껴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중간에 내려서 사진 몇 장씩들을 찍고는 있었으나 그들은 끝을 갈수록 떨어져가는 비구름 뒤의 희미한 태양의 흔적이나 내 발걸음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가다 죽은 시늉을 하는 빨간 배를 가진 게들은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둑 아래에서는 가끔 바다처럼 펼쳐진 갈대숲이 지평선이 되기도 하는 것은 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는 점점 더 지고 술 생각은 더욱 간절해져서 끝은 결국 보지 못했다. 갈대숲 지평선 뒤로 사라지는 해를 보고 싶었는데 구름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갯벌 위에 달이 뜨는건지 해가 지는건지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매일 알 수 있는 것처럼 해가 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술을 마시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blog comments powered by Disqus